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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알’ 선감학원 비극, 노예의 삶을 살았던 아이들 ‘충격’(종합)
2020-08-16 00:24:33
 


[뉴스엔 이민지 기자]

선감학원의 비극이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8월 15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광복절을 맞아 일제 강점기에 세워져 40년간 운영된 선감학원의 실체를 파헤쳤다.

2017년 서해 한 바닷가에서 알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무속인 하나보살. 그는 "많은 사람들이 나 좀 알아봐달라는 절규를 보내는 사인 같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리여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고 회상했다. 이 바다에는 어떤 비밀이 잠겨있는걸까.

마을 주민들은 아주 오래전 간조 때마다 목격했다는 끔찍한 장면을 회상했다. 움푹 파인 갯벌의 물길 갯고랑에 어린아이들이 빠져 숨진 채 발견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그 아이들이 선감도에서 탈출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다 사망한 아이들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대체 왜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야 했던 것일까.

오래 전 이 섬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을 만났다. 7번의 시도 끝에 탈출에 성공했다는 임용남 씨는 지금도 여전히 섬에 갇혀 있는 악몽을 꾸곤 한다고 했다. 그는 "내가 11살인가 12살에 들어갔는데 역 앞에서 누가 멱살을 딱 잡았다. 보니까 경찰관이었다"며 1963년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길거리 생활을 하던 임씨는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곳엔 이미 거리에서 붙잡혀온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그 중에는 12살 류규석 씨도 있었다. 류씨는 친구들과 놀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 경찰에게 붙들려 강제로 차에 탑승했다.

다음 날 단체로 배에 오른 아이들이 도착한 곳은 경기도 안산 선감도였고 섬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지옥이 시작됐다. 당시 14살이었다는 김영배 씨는 "인솔자가 3명인가 있었다. 잡히는대로 패더라"고 밝혔다. 입고 있던 소지품을 모두 압수 당하고 똑같은 옷과 고무신으로 갈아신은 아이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폭력이었다.

맞고 또 맞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잔인한 폭력. 그런데 매를 맞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아이들이 감당하기 버거운 노역이었다. 배고픔도 아이들의 일상이었다. 성장기 아이들의 배를 채워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식사. 그런 아이들의 배를 채운 것은 따로 있었다. 개구리, 뱀, 쥐까지 잡아먹은 것이다. 그마저도 귀한 탓에 흙으로 배를 채우는 아이들이 있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노예 같은 삶에 많은 아이들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살아서 바다를 건넌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마을 주민들은 바다에서 생을 마감한 아이들이 섬 곳곳에 그대로 암매장 됐다고 밝혔다. 이유도 모른 채 이곳에 끌려온 뒤 갖은 폭력과 노역, 배고픔에 시달리다 죽음으로 내몰렸던 아이들. 선감도의 정체는 무엇일까.

당시 정권은 거리의 부랑아를 교화시켜 자활의 기회를 준다고 했고 그 일환의 하나가 선감도에 있었다. 세상은 그곳을 선감학원이라 불렀다. 집 없는 아이들이 새 삶을 그리는 희망찬 보금자리로 선전됐던 이곳. 하지만 이곳에 수용됐던 4,691명의 아이들 중 절반은 부모가 있었고 상당수가 고아도 부랑아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수집 대상으로 기록됐다. 단지 옷차림이 남루하다는 이유만으로 가족과 생이별하고 끔찍한 삶을 살아야 했다. 소년판 삼청교육대라 불리는 선감학원. 섬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비밀은 여전히 이곳에 갇혀있다. 그들 중 절반 이상은 10살 이하의 어린 아이들이었다.

일제와 국가에 의해 이곳에 수집되어온 아이들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 끌려온 것일까. 해방 이전인 1942년에 세워져 1982년까지 존재했던 선감학원에서는 어떻게 40년이란 긴 시간동안 비극이 이어져 왔던 것일까.

매일 밤 들려오던 소리는 아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마치 하루 일과처럼 잠들기 전 단체 기합을 받고 매를 맞아야 했다. 가혹한 매질 뒤에는 한겨울에도 모두 발가벗겨진 채로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야했다. 아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얇은 담요 한장 뿐이었고 그마저도 부족해 여러명이 나눠 덮어야 했다. 당시 숙소 일부가 남아있는 선감도. 지금은 텅 비어있는 상태다. 방 한개당 수용인원은 30여명. 제대로 누울 수도 없어 칼 잠을 자야했다. 겨우 눈을 붙이려고 하면 어김없이 시작된 또다른 악몽이 있었다. 기숙사마다 원생들을 관리하는 간부급 원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이 어린원생들을 성폭행했다는 것이다. 선감학원 직원들은 나이 많은 원생들을 사장으로 임명했고 어린 아이들에 대한 폭력을 묵인했다. 잔인하면서도 조직적으로 아이들의 인권을 유린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수소문 끝에 오래 전 선감학원에서 근무했던 한 남자를 만났다. 전선감학원 직원은 "1950년 11월에 선감학원에 가 한 6년 애들을 교육시켰다. 그걸 보면서 울화가 치밀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폭행을 한다든가 중벌을 준다든가 그런건 일절 없었다.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가 자식처럼 사랑하고 교육도 열심히 시켰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우린 가정이 있는 애들은 받질 않았다. 보냈다"고 말했다. 또다른 직원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그는 "어떻게 애들을 곡괭이로 때리냐. 그건 낭설이다. 여기에서 학교도 보내고 이발, 재봉, 목공도 가르쳤다. 그냥 놀리지 않았다"며 자립에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선감도 카스테라라 불리는 빵까지 만들어줬다고 주장했다. 직원들의 주장에 생존자들은 "내가 있을 때 만큼은 썩은거 그런거 먹었다. 그거라도 많이 주면 배라도 부르지. 그것조차도 조금 밖에 안 줬다", "맞아본 사람들이나 아는거지"고 말했다.

1964년 한 신문에 실린 피해자 배명기씨 이름이 실렸다. 한 기자의 취재 덕에 선감학원에 대해 보도됐던 것. 1956년 선감학원으로 취재를 나갔던 이창식 기자는 "내부에서 제보자가 들어왔다. 애들을 수용해놓고 도에서 나온 지원금을 제대로 쓰지 않는다고 했다"고 밝혔다. 취재 끝에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사무비는 흔히 연필이나 사무용품인데 거기서 무슨 사무비가 그렇게 많이들까"라며 지나치게 높은 사무비가 의심스러웠다고 회상했다. 또 "운영비도 마찬가지다. 그 돈이면 꽁보리밥에 호박국, 간장 한가지 이건 아니지 않냐. 그 정도의 예산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 돈은 다 어디에 쓰인 것일까. 염전 관리와 양장점, 아이들의 노역으로 벌어들인 수익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경기도지사가 선감학원 시찰 뒤 문제점을 해결하겠다고 했으나 문을 닫기 전까지 공금 횡령 등은 계속됐다. 당시 선감학원 관리기관은 경기도였고 원장을 맡은 이들은 경기도 소속 공무원들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선감학원에서 아이들이 고초를 겪고 있음을 알고도 도와주지 못했다. 당시 마을주민은 "원장이 대통령이나 마찬가지다. 대부도에서도 최고다", '원장이 면장보다 위다. 직급도 높고 직원도 있고 주민들이 봤을 때는 굉장한 권력이다"고 회상했다. 선감학원 직원들 중 원장과 친인척 관계였던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 탓에 마을 주민들도 아이들의 편이 되어주지 못했다. 바다를 넘어 겨우 탈출했으나 마을 주민들에게 잡혀 선감도로 다시 끌려간 아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잡아온 주민들 손에는 밀가루 한봉지가 주어졌고 돌아온 아이들은 더 가혹한 매질과 고문을 당했다. 사망한 아이들의 시신을 묻는 일도 동료 원생들의 몫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가마니에 둘둘 말린 채 장례절차는 물론 어떤 표식도 없이 땅에 묻혔다. 누가 왜 죽었는지, 몇명의 아이들이 이곳에 묻혔는지 아무도 모른다. 제대로 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생존자들의 증언 뿐이다. 선감학원 원아대장 기록에 의하면 선감학원에서 사망한 아동은 24명. 그러나 생존자들이 직접 묻어준 아이의 이름은 기록에 없다.

GPR(지하탐지레이터) 탐사로 일부 지역을 살펴봤다. 유해가 묻혀있는 것으로 보이는 신호가 잇따라 감지됐다. 공동묘지에 몇개의 유골이 묻혀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2년 전 유해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박선주 교수는 "그 안에 130~140구가 있었고 주위까지 하니까 150~160구가 나왔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016년 암매장 된 유해 한 구를 그곳에서 발견하기도 했다. 땅 속에서 뜻밖의 물건도 발견됐다. 손바닥 절반 크기의 아주 작은 고무신 한켤레였다.

일본 혼슈 오카야마현의 작은 마을에서 이하라 히로미쓰 씨를 만났다. 선감학원의 참상을 세상에 처음 알린 인물이다. 1942년 일제에 의해 처음 세워졌던 선감학원. 그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선감학원 부원장으로 발령나면서 당시 8살이었던 이하라 씨도 3년간 선감도에 머물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에서의 기억을 좀처럼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속죄의 마음으로 40년에 걸쳐 선감도의 이야기를 적었고 1989년 세상에 이야기가 공개됐다. 이하라 히로미쓰 씨는 "해변에 떠내려온 죽은 아이를 본 적이 있다. 그것도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특별히 심했던 건 잡혀 돌아와 맞는 모습을 봤을 때다. 피가 났었다"고 말했다. 감옥처럼 일본 순사의 감시를 받으며 허리조차 펼 수 없는 어둡고 비좁은 곳에 갇혀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일제강점기에도 많은 아이들이 선감도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1996년 선감도 야산에서 키 150cm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선감도에 수감된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이었을까. 왜 일제는 이런 시설을 만들었던 것일까. 20년이 넘도록 선감학원의 진실을 파헤쳐온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을 만났다. 그는 1940년대 당시 서울로 모여든 빈민들을 일제는 범죄의 온상인 암적인 존재라 규정했다. 소위 부랑아를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갱생 시키겠다며 전국에 감화령을 설립한 것. 그에 따라 선감학원도 세워졌다. 수용인원이 500명까지 가능한 대규모 시설이었다. 1942년 봄 선감학원에 첫발을 내딛은 아이들. 당시 섬에는 90여가구 500여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15가구 70여명만 남기고 모든 주민들을 섬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일제가 들인 비용은 50만원.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40억원이 넘는 규모다. 이렇게 큰 돈과 많은 공을 들일 정도로 당시 조선의 부랑아 문제가 심각했을까. 전체 범죄 건수 중 소년 범죄율은 약 10%뿐이었고 생계를 위한 절도가 대다수였다.

이하라 씨는 당시 선감학원의 하루 일과 중 특별한 수업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그는 "오전 중에는 일본어를 가르쳤고 1,2시간 정도 군사훈련 같은 것도 했다"고 밝혔다. 선감학원에서 있었던 군사훈련 이야기는 일제 말기 조선에서 발행되던 한 잡지에도 실려있었다. 또 일왕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황국신민화 교육도 있었다. 1943년 일본인 교관과 원생들이 수업하는 사진도 남아있다. 칠판에는 '명예로운 일본의 군인이 된다는 일은 더없는 행복이다' 등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선감학원이 세워진 1942년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총알받이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선감원은 조선감화령이란 법령으로 설치, 운영됐지만 문을 열기 직전에 조선 소년령으로 법령이 강화됐다. 이로 인해 입소대상은 18세 미만에서 20세 미만으로 확대되고 더 많은 소년들이 입소했다. 조선소년령의 목적은 무엇일까. 당시 판검사들이 회의한 내용을 보면 대동아전쟁의 인적자원을 늘리자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태평양 전쟁에 수집돼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 비극은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야 끝났다. 그런데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오며 선감학원의 소유권은 경기도에게 넘어갔다. 경기도 역시 이를 부랑아 수용시설로 활용하면서 선감도의 비극은 무려 36년간 국가의 손에 이어졌다.

여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한국 사회복지사업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학묵 당시 장애인 복지단체 협의회 회장의 이름을 뜻밖의 문서에서 발견됐다. 해방 이후인 1946년 경기도 사회과장으로 이름을 올린 김학묵 회장. 경기도 사회과는 해방 후 선감학원 운영을 담당했던 부서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1947년 경기도지사와 선감학원 재건 계획을 위해 선감도를 시찰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도 김학묵 회장은 경기도 사회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일제가 선감학원을 설립할 당시 관련 업무를 맡았던 곳 역시 경기도 사회과였다. 선감학원은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는 민간단체이며 해당 해당 지부를 이끄는 이들은 경기도 공무원들이었다.

여기에 주목해야 할 또 한사람. 우리나라 대표적 입양기관을 설립하는 등 김학묵 회장과 마찬가지로 사회사업에 한 획을 그은 백근칠 한국사회봉사회 전 회장이다. 아이들은 가정에서 양육되고 성장해야 한다며 탈 시설을 강조했던 백근칠 회장의 이름을 오래된 경기도 인사기록철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1948년 선감학원 부원장에 이어 1952년까지 선감학원 원장을 역임한 사실을 확인했다.

해방 이전과 이후, 경기도 사회과에 몸담았던 김학묵 회장과 일제가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보조주임으로 근무하다 해방 이후 선감학원 원장이 된 백근칠 회장. 두 사람은 해방 전 조선총독부 사회과에서 근무했던 하상낙 씨와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1958년 귀국해 함께 서울대 사회사업학과를 설립했다. 이후 보건복지부 차관, 해외입양기관 회장으로 우리나라 사회사업의 1세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관료였던 이들이 일제강점기로부터 내려온 선감학원의 어두운 이면을 봤을 가능성이 높음에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없다. 김학묵 회장과 백근칠 회장의 공적 기록에는 선감학원에 대한 내용이 빠져있다.

전문가들은 "사회복지계 내에서도 일제의 청산되어야 할 과거사가 존재하고 있다. 일제 내에서 벌어졌던 다른 문제들보다도 더 많이 깊이 묻혀있는게 사회복지와 자선의 탈을 쓴 시설 수용의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선감학원의 비극은 한 일본인의 용기있는 고백으로 드러나게 됐다. 일본에서 비국민이라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이하라씨가 없었다면 이 비극은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일제시기 선감학원에 대한 기록 역시 이상하리만큼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선감학원의 진실을 쫓던 제작진은 또다른 목격자들의 존재를 알게 됐다. 누구보다 더 가까이 선감학원을 지켜봤을 두 사람. 대한민국 사회복지 선구자로 굵직한 이력을 남긴 김학묵, 백근칠 회장이다. 이들의 공은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방관자였던 자신을 평생 사죄하는 자세로 살아온 이하라 씨와 달리 선감학원의 어두운 부분을 공론화 시키지 않았다. 일제가 남긴 그늘을 청산하지 못한 실책은 우리 역사에 또다른 비극을 낳았다.

6살이던 1966년 선감학원에 수감됐다 6년만에 탈출했다는 김성곤 씨. 탈출만 하면 모든 것이 이전의 평범한 삶으로 되돌아 갈거라 믿었는데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삶이 무너진 것은 선감도에서 겪은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감학원에서 탈출하고 평범하게 살던 그는 30살 때 부산에 놀러갔다 얼떨결에 탑차에 실려야 했다. 그는 차에 실린 다른 사람들과 그대로 부산시 북구에 위치한 부랑아 수용소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아 수용시설이 됐던 형제복지원은 장애인, 고아, 연고 있는 이들을 불법 감금하고 강제 노역을 시키고 구타와 성폭행을 했고 수많은 사망자들을 만들었다. 김성곤 씨는 20년 전의 그곳으로 다시 끌려간 기분이었다고 한다.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은 모든 것이 닮아있었다. 전문가들은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운영의 근거가 된 내무부 훈령에 보면 부랑아에 대한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조선 감화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쉽게 말해 경찰이 수상하다 여기면 부랑아가 된 것이다. 일제 후 국가가 내세운 사회정화는 더 가혹하고 폭력적인 행태로 나타났다.

잔혹한 국가폭력의 결과물이었던 선감학원 사건의 피해는 오롯이 피해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남들에게는 평범하기만 한 일상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이들. 제작진이 만난 생존자들은 배움의 기회를 잃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지 못한 채 기초생활수급자로 지내고 있었다. 또 트라우마로 일상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대로 된 사과도 위로도 받지 못했다.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됨에 따라 선감학원 사건도 재조사가 가능하게 됐다. 당시 가해자였던 경기도는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과 진상조사를 약속했다. 선감학원 사건은 청산하지 못한 일제의 잔재이고 피해는 여전하다. 지금까지 확인된 피해 생존자는 100여명이고 팔순을 바라보고 있다. 선감학원의 비극이 왜 피해자의 몫으로만 남았는지 일제의 그늘이 여전히 남아있는지 더 늦기 전에 국가가 대답해야 할 때이다. (사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캡처)

뉴스엔 이민지 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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